2022. 8. 1. 10:00ㆍ작품 읽어보기
The citizen 시민
국립현대 미술관 과천 - 리처드 해밀턴 : 연속적 강박
[리처드 해밀턴: 연속적 강박]전은 2017-2018년 한국과 영국 - 상호 교류의 해를 맞아 기획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개최되는 리처드 해밀턴의 개인전입니다. 2011년 작가가 타계한 이후 영국 - 테이트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리처드 해밀턴의 작품세계가 재조명되었지만, 국내에서는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드물었습니다.
1922년 런던에서 출생한 리처드 해밀턴은 새로운 관념으로 현대 사회를 바라보고 이를 시각적으로 재해석 한 영국을 대표하는 팝아트 혁신가 입니다.
리처드 해밀턴은 현대 사회의 대량 생산 이미지에 매료됐고 인간의 소비, 욕망의 생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재생산과 그것의 작동 방식에 주목했습니다. 리처드 해밀턴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매체의 기술에 대한 연구와 그 발전에 따른 작업의 전개는 깊고도 절대적이었습니다. 부단히 탐구하고 실험하고 다듬어가며, 작가는 하나의 이미지와 주제를 지속적으로 재해석하고 일련의 작품들을 재제작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방식과의 관계를 탐색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밀턴의 연작은 전작의 기원을 담고 있는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와 그 의미들의 정수에 대한 탐색이 누적된 다중적인 탐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해밀턴: 연속적 강박] 전시는 한 작가의 궤적을 살피는 데 있어 특별한 유형의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는 리처드 해밀턴의 총체적인 작업에 대한 서사적이며 전형적인 회고전이라기 보다는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60년의 시간에 대해 일종의 클로즈업과 같이 작가의 특정 작품군 또는 연작을 중심으로 구성됐습니다. 가정용 전자제품에서 꽃, 그리고 팝스타와 정치범까지 작품의 소재와 주제는 광범위하지만 여기에 선별된 연작들은 작가가 강박에 가깝게 천착해 온 주제에 대한 반복과 재해석이라는 방식으로 축적된 '복합적인 장치'를 통해 해밀턴 작업의 거듭되는 특징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번 전시는 현대사회의 비판적 관찰자이며 참여자로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확장해 온 리처드 해밀턴의 다층적인 작업세계를 보다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지금 보시는 작품 <시민 The citizen>은 리처드 해밀턴이 1980년대 영국에서 심화되었던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과 분쟁, 갈등을 주제로 10년에 걸쳐 제작한 <시민 The citizen>(1982-83), <국민 The subject>(1988~90), <국가 The state>(1993) -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아일랜드 현대사의 '암흑기' 중 메이즈 교도소(Maze Prison)에서 발생한 '불결 투쟁 (Dirty Protest)'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은 테러를 벌여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를 영국 BBC방송국에서 취재하여, 최초로 언론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해밀턴은 이 보도 장면을 계기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옥에 투옥된 아일랜드공화국군 (IRA) 은 자신들을 단순 범죄인이 아닌 정치범 대우를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정부는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불결 투쟁 (Dirty Protest)을 벌인 것입니다.
죄수복 착용을 거부하고, 알몸에 담요를 뒤집어쓴 채 씻지도 않고 대소변도 감옥 안에서 해결하며, 급기야 자신들의 분뇨를 벽에 칠하고 단식투쟁까지 벌이게 됩니다. 작가는, 텔레비전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방송의 스틸 컷을 발췌하고, 수감자 중 한 명을 실물 크기로 그리고 캔버스 두 개를 붙여 갈색의 소용돌이 패턴이 표현된 대형 회화로 완성하였습니다.
왼쪽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갈색의 소용돌이는 사실 그들이 벽에 칠한 분뇨의 흔적입니다. 2폭의 작품을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게 하는 금속 프레임은 시간이 지나면서 녹이 슨 것이 아니라 철창의 감옥 느낌을 담아내려 일부러 부식시켜 의도적으로 사용한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당시 영국 대중들에게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황당하고 무모한 테러리스트로 생각되었는데, TV를 통해 보여진 현장은 불결한 상태 속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며, 마치 감옥 속의 순교자처럼 비쳐졌다고 합니다.
당시 북아일랜드에 관련하여 언급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해밀턴은 그 드문 예술가들 중 한 명으로, 아일랜드공화국군의 폭력적 방법은 용납할 수 없지만, 죄수들의 투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느꼈다고 합니다.
해밀턴은 이렇게 당시 영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회적 쟁점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어떻게 현실을 바라보고 / 미술가로서 그것을 어떻게 작업에 반영하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아일랜드 [Northern Ireland] *
북아일랜드 지역은 일찍이 켈트족이 살고 있었으나, 12세기 이후 영국의 귀족 및 영주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17세기에는 북부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인구 확보를 위한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얼스터 식민’이 이루어졌다. 영국에 의한 ‘얼스터 식민’은 다른 아일랜드 지역의 가톨릭계 주민과 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고, 지형적인 장애요인이 가해져 남부와는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랜 아일랜드 민족운동의 결과, 영국으로부터의 자치 또는 독립 문제가 대두되자, 영국과의 연합을 바라는 얼스터 유니어니스트들의 요구를 이유로 1920년 아일랜드 통치법을 제정, 얼스터 6개주를 아일랜드의 다른 26주와 분리시켜 북아일랜드가 성립되었고, 1922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영국령으로 남게 된 북아일랜드가 소수 가톨릭계 주민에게 취업차별·불평등선거 등으로 심한 차별정책을 취하여 신·구교파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1969년 7월에는 런던데리에서 신·구교파 양측 간에 일대 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양측의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0월까지 계속되었다.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남 ·북 아일랜드의 통일을 주장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활동으로 격화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IRA는 폭탄 테러·게릴라전 등으로 영국 군경에 맞섰으나 1985년 11월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북아일랜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 참고 자료
메이즈 교도소 [Maze Prison] *
여왕 전하의 교도소 메이즈(Her Majesty's Prison Maze)는 북아일랜드 다운 주에 소재한 교도소이다. 1971년 중반에서 2000년 중반까지 북아일랜드 분쟁에 참여한 준군사조직 요원들을 체포 수감하는 데 사용되었다.
메이즈(Maze)는 아일랜드어로 '평원(Plain)'이라는 뜻인데요 수용소로 운영하던 '롱 케시 교도소(Long Kesh Prison)'를 폐쇄하며 바로 인근에 세운 교도소가 바로 '메이즈 교도소(Maze Prison)'입니다. 북아일랜드 밸파스트 외곽에 있는 이 교도소는 1976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수용 당시부터 예사롭지 않던 이 교도소는 1981년 그 유명한 'Hunger Strike(단식투쟁)'의 무대로 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IRA 수용자들에 대한 교도소 내에서의 폭압적인 탄압과 부당한 처우에 맞서 '바비 샌즈(Bobby Sands)' 등 10명이 극한의 단식투쟁에 돌입한 끝에 교도소 안에서 모두 생을 마감하게 되죠.
이 교도소는 구조가 영문자 'H' 모양으로 매우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H-Block'으로 불리는 이 수용사동은 모두 8개가 있었습니다. 5미터의 콘크리트 담벼락이 전체를 두르고 있었고 9미터 높이의 감시대 12개가 수용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1983년에는 이 엄중한 교도소에서 무려 38명의 수용자가 집단 탈옥을 하는 영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탈옥 과정에서 교도관 한 명이 사망하고 다섯 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지요.
또한 수용자들 중 상당수가 IRA 내지는 왕당파 소속 지도부들이 많아서 서로에 대한 살상행위들도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물론 교도관들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지요. 1993년까지 29명의 교도관들이 살해되었다니 교도소라고 하기보다는 거의 전쟁터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1998년 이곳에서도 적대관계에 있는 세력들이 '성 금요일 협약'을 맺고 오랜 반목 관계를 종식하게 됩니다. 북아일랜드 정치상황이 평화로워지며 교도소 수용자들도 출소하며 메이즈 교도소의 수용인원도 차츰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2000년 9월 29일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네 명의 수용자를 다른 교도소로 이송 보낸 후 짧은 역사를 뒤로한 채 메이즈 교도소는 2006년 10월 30일 철거되었다. 그러나 2013년 4월 18일 북아일랜드 사무국은 아직 헐리지 않은 교도소 건물을 평화센터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 참고 자료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 광주매일신문 (kjdaily.com)
영화 ‘헝거’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66일 동안 단식투쟁(huger strike)을 벌이다 사망한 보비 샌즈(B. Sands)를 그린 영화다. 오랜 역사 동안 영국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받았던 아일랜드는 지난한 전쟁 끝에 1921년 남부 26개주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그러나 다수의 주민이 영국에서 이주한 신교도였던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아, 그곳의 카톨릭 원주민들은 계속해서 신교도들에 의해 차별과 억압을 받게 된다.
샌즈가 소속돼 있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무장 투쟁을 통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통일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민간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들을 테러단체로 지목했고,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며 무차별 체포했다.
게다가 79년 수상이 된 마거릿 대처는 ‘범죄는 범죄일 뿐 정치적인 살인이나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고, 그간 전쟁포로 대우를 받았던 수감자들은 정치범이 아닌 일반 범죄자로 다뤄지고 만다.
‘헝거’의 배경이 된 1981년 메이즈 교도소는 샌즈를 비롯한 여러 공화주의자들의 마지막 투쟁지였다. 이들은 정치범의 지위를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는 모포투쟁을 벌였으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씻는 것을 거부하고 음식물을 썩히며 배설물을 감방벽면에 바르는 불결투쟁을 펼쳤다. 이들은 왜 이렇게나 야만적인 방법으로 투쟁했을까?
영화는 한 남자의 손으로부터 시작한다. 맑은 물에 씻어내는 청결한 손, 냅킨 위에 떨어지는 빵부스러기조차 털어내는 세심한 손, 요양원의 어머니를 찾아 꽃을 건네는 다정한 손을 가진 그는 메이즈의 교도관이다.
‘교양 있는 손’을 가진 그는 수감자들의 ‘불결한 몸’을 폭행하는 일을 업무로 한다. 메이즈에서 수감자들은 강제로 수염이 잘리고 오물과 피로 얼룩진 육체는 욕조에 구겨 넣어져 세척된다. 또한 감방 벽면에 빽빽하게 칠해진 대변은 살수기가 내뿜는 강한 물살에 흔적 없이 지워지며, 복도로 흘려보낸 소변은 세제가 뿌려져 꼼꼼하게 청소된다.
이처럼 영화는 불결과 위생, 야만과 교양을 대비시키면서, 진짜 야만스러운 것은 육체성을 드러내는 불결이 아니라, 교양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곳에 있음을 폭로한다.
기꺼이 야만이 됨으로써 진짜 야만을 고발하려고 했던 오년간의 투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샌즈는 육체를 통해 할 수 있는 마지막 투쟁, 곧 생명을 내건 단식투쟁을 결심한다. 영화의 후반 이십분은 단식투쟁에 돌입한 샌즈가 점차 말라가며 육체의 기능을 잃어 결국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묵묵히 담아낸다.
‘반항(revolt)’이라는 말의 본래 뜻이 ‘획 돌아서며 돌변하는 것’에서 왔듯이, 반항은 그동안 유지되고 있었던 관습이나 권위에 돌연 의문을 갖고 맞서는 행위를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카뮈(A. Camus)는 반항의 순간에 인간은 비로소 자기 권리에 대한 의식이 싹튼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기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문제는 단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샌즈는 신부와의 면담에서 ‘내겐 내 생명이 전부고, 자유가 전부다’고 말한다. 자유로울 권리를 위해 생명을 건다는 것은 그 권리를 자기의 목숨보다 더 높은 것으로 두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샌즈의 뒤를 이어 스물두 명의 투사가 단식투쟁을 펼쳤고 그중 열 명이 생명을 잃었다. 이들의 값진 희생으로 정치범들에 대한 처우 개선 요구가 상당부분 실현됐고, 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운동이 더 활발해졌다. 카뮈가 생각했듯 반항은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최초의 의식적 행동이자, 개인적 시련에서 벗어나 연대를 형성하는 공동의 토대다. 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빌어 이를 간명하게 표현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출처 : 최송아 (전남대철학연구교육센터)
※ 설명되는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도슨트에게 제공하는 자료에 기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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